권오봉은 행위의 프로세스를 통해 선의 운동, 일테면 선의 자유로운 유회를 현시한다. 형과 선의 전위,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 선은 더 이상 상(image)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직감에 의존되어 화면을 긁어가는 손의 창조적인 자발성을 통해 이미지를 거부한 채 프로세스 그 자체를 보여준다. 캔버스의 표면은 긁고 칠하고, 다시 긁어가는 반복된 행위는 일상의 단조로운 삶의 형태, 혹은 존재의 확인과 동시에 상실감이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기호속에 녹아 근원적 충동을 반추한다. 그리고 작가의 선의 담론이 되고 있는 ‘절제된 무질서’는 자유로운 움직임과 질서 사이의 간극에 내적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이 번 전시에서 작가가 시도한 역동적인 선의 움직임을 통해 작가 자신의 존재를 담아 선을 긋고, 다시 지우고, 또 긁어내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파악 자체가 만만치 않다. 또한 그의 작업이 건네주는 선의 담론은 다만 순수 추상에서 연유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 우리를 당혹케 한다. 그래서 일견 선을 모티브로 한 그의 회화적 공간이 얼른 보기에 미학적 무기력함에 빠져있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선을 통한 회화적 글쓰기는 유기적인 미학의 운동이다. 그래서 그의 회화적 공간은 선의 다이나마즘을 통해 생명감을 일깨운다. 일테면 부드럽게 이어지는 레카토(legato)의 선과 짧게 끓어자는 다이나믹한 스타카토(stacato)의 선은 다양한 변주를 통해 선의 소리를 연주한다. 그래서 창조적인 근원을 일깨우는 디오니소스의 합창이 선의 무한한 변형들을 통해 노래로 그려진다.
일면, 현대의 불안과 위기감에 대응한 그의 선의 울림은 마치 배가 고파 우는 어린아이의 울음이나 무관심과 소외 속에 내몰린 어린아이가 관심과 시선을 끌어내기 위해 적절한 거리를 확보하고 강한 제스처를 내보이는 것과 같아 보인다. 이점은 불안한 존재의 조건들을 자유로운 유희의 연상작용을 통해 우리 인식의 한구석에 있는 무감감을 뽑아내는 통찰로 작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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