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희 정 | 시공갤러리, 큐레이터 그린다는 동사는 언제나 ‘무엇을’에 해당하는 목적어를 필요로 한다. 더욱이 백색의 침묵하는 화면은 그리는 것을 업으로 살아가는 화가들에게는 강박적 옥죔으로 작용할 것이다. 현실적 지평과 괴리되는 독창성에 대한 독촉과 이에 따른 결과물로 화가 자신조차도 불확실한 몸짓에 타인으로부터 어떠한 이해를 구해 받을 것인가? 위대한 전범(典範)들에게서 물려받은 부채를 감당해가며 어떻게 미래의 새로운 지각을 개척해 나갈 것인가? 당면한 시대를 유희로 답하기에는 너무나 진지하고, 실천으로 대응하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존재가 예술가가 아닌가? 그러기에 단 한명의 잉여적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예술가에게 허락된 캔버스는 삶을 자각하게 하는 절실한 매개인 것이다. 권오봉의 작업은 외현적으로는 선(線)을 실현한다. 구체적 대상을 증발시킨 순수 가능태로의 선들이다. 규칙적이기도 하고 불규칙적이기도 하면서 집중되기도 하고 확산되어나가기도 한다. 그것들은 미적으로 거리를 두면서도 어떠한 개념화로도 정초(定礎)되지 않는다. 그저 화면에 그런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만족하는 것 같다. 세상에 던져진 우연적 소산이라고 말하듯 선들은 화면너머의 이상과도 작가에게서 비롯된 타율성과도 절연한다. 그것은 오직 의미를 두지 않음, 즉 무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다다와 초현실주의가 합리적 이성에 반대하기 위해 가지고 온 우연적 기법이 결국 ‘암시’와 ‘연상’작용이라는 전달과 수용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었듯이 캔버스라는 자기장위에서 의미화로부터의 이탈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무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함이라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권오봉의 선(線)은 이러한 무의미적 순수태(純粹態)로의 환원을 ‘말함’이다. 그에게 그리는 행위, 즉 캔버스위에 대상을 그린다는 것, 색을 칠한다는 것은 생산적 입장에서는 롤랑바르트에게서처럼 펜 끝에 존재하는 작가를 지워버리는 행위이며, 결과론적으로는 슈비터즈의 ‘메르츠(Merz)’에서처럼 이미지들 간의 유기적 연관성을 해체하는 일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것은 기존의 가치들을 의식적으로 부수려고 하는 반항의 살아있는 정신이며, 표상과 실재간의 명중성을 회의하는 의미 없음의 실천이다. 사실 역사는 기존의 가치들과 반항이라는 수많은 안티테제들간의 역동성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가 아닌가? 하지만 반항이라는 것은 상대를 절대적 성역으로 바라볼 때 일어난다. 무엇인가를 타파하고자 하는 적극적 행위는 대상에 대한 철저한 반성적 사고와 소속감 속에 있을 때 이루어진다. 죽음에의 충동이 강한 삶에의 집착에서 비롯되듯 그의 무의미 또한 의미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고 다시 걷어내는 행위, 제도적으로 익은 손재주를 피하기 위해 붓 대신 끌어들인 중성적 매개물, 그러한 것들은 작가가 무의미를 말하면서도 캔버스를 버리지 못함을 역설한다. 그의 무작위적 선들이 일견 자유롭고 유희적인 외현을 지니고 있어 동양적 선사상과 같은 긍정적인 관념론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거기에만 머무르기에는 정도를 넘어서는 어떤 격렬함과 잉여가 있다. 그것은 회화의 무의미를 회화로 응답하는 질문과 대답 가운데 초극으로 나아갈 수 없는 작가의 분투하는 행위에서 드러난다. 게다가 그 행위가 어딘가를 향해 외치는 반성적 고백과 고발이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권오봉의 그림이 주는 진정함은 무의미라는 파괴에서 찾은 자유이며, 제도적 답습을 표백시킴으로 얻은 순수함으로의 유희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대하면서 우리는 막연한 관념론적 자유나 유희의 피상성을 넘어 신탁 없는 굿을 동기화하여 혼신을 다함을 자각하는 예술가의 행위에서 오는 파토스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