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승|미술평론 권오봉의 작업을 음악에 비유한다면 ‘락’이라 할 수 있다. 하드락 기타의 강렬한 리프와 비트가 선들을 따라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화면 위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선들은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그의 천진난만함과 닮아 있다. 현대인들이 미술에서 찾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뛰어난 아티스트, 곧 그의 재능이다. 재능에 대한 찬미가 화제가 될 때 정작 작품에 대한 질문은 찬미 속에 가려지기 쉽다. 가령 미니멀 아티스트들의 작업은 겉보기에는 조용하니 최소한이지만 정작 사람들 사이의 반향은 떠들썩한 숭배에 가깝다.미니멀 아티스트의 작업은 사실 작가의 개입을 절제하고 최소화하여 작품이 줄 수 있는 일체의 환영의 기미를 거절하자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뒤샹의 교리를 따른 사물의 선택을 자신들의 유일한 수고로 삼을 때 우리가 그들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덩그러니 사물뿐이다.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보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미한 자기 지시에서 금욕은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그런데 작업에 관한 그들의 절제와 금욕은 신앙에 이르지만 작품의 효과는 명성을 안겨준다. 최소의 제스처가 낳은 최대의 효과. 효과의 조명 아래에선 절제와 금욕마저 재능이란 이름으로 보상받는다. 더구나 기계적이고 물리적이기도 한 미니멀리즘의 금욕적 즉물성은 동양정신의 깊이로까지 그 의미망을 늘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왜 그들의 재능에 갈채를 보내는가? 도대체 왜 재능인가? 농사일이나 공장 일을 말하면서 우리는 재능을 말하지 않는데 왜 미술을 말하면서 재능을 말하는가? 미술에서 재능을 말하면서 우리가 동경하는 것은 예외적인 권리를 지닌 예술가이다.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뛰어난 아티스트라 부른다. 그를 굳이 저 먼 곳으로부터의 은총이라 믿으며 숭배를 아끼지 않을 때 우리에게도 보상이 없지 않다. 예술가의 재능에 대한 우리의 미신에 가까운 경의는 사실 우리의 초라한 보존 생리에 관계하고 있다. 니체식으로 말해서 예술가의 별도의 재능에 대한 경의는 우리의 허영과 우리의 자존심에 관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자존심이 상하지 않기 위해 그들의 재능을 우리와는 먼 곳에 있는 하나의 우연이나 기적처럼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예술가에 대한 경의를 풀고 허영을 버릴 때 우리는 그에게 조금은 더 인간적으로 다가서게 된다.그런데 예술가 또한 사람들의 미신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경이로운 능력에 힘입어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믿음을 떨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삶의 경작에서 ‘밭고랑은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예술가와 사람들 사이에는 함께 걸으며 그어가야 할 저마다의 고랑이 있는 것이다. 클레의 말처럼 “예술가와 문외한에게는 공통의 영역이, 예술가가 반드시 예외적 경우로 등장하지 않는 그러한 만남의 장소가 진정 존재해야 한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저마다 멋모른 채 낯선 밤길에 던져진, 그저 그렇게 서툴고 어렵게 자신을 되찾아 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권오봉의 때로는 휘갈긴, 때로는 서툴게 그은 선은 그 길에서 만나는 원초의 몸짓과도 같다. 그런데 담벼락에 그은 아이들의 낙서나 선사 시대 동굴 어두운 암벽에 그어진 선에서 글도 그림도 아닌 어떤 서툰 흔적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순간 문득 침묵 속의 인기척과도 같은 어떤 부름에 휩싸인다. 그런데 그 부름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권오봉의 작업은 어떠한 회화적 관례나 기량으로부터도 떠나 있다. 그의 작업에서는 우선 눈이 주도하는 회화적 관례가 기능을 멈춘다. 가령 눈을 감고 긋거나 긁기를 마다않듯이 그의 그림에는 시각적 통제나 조정의 장치가 없다. 그리고 손 또한 어떠한 회화적 기량에 대한 부담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조형적 효과를 위한 일정의 개성적 기량을 요구하는 붓을 버리고 대신 빗자루 갈퀴 꼬챙이 나이프 등 긋거나 긁는다는 행위의 익명의 흔적만을 신속히 담아낼 수 있는 작업 도구를 택하면서 그는 결국 눈, 손, 작품으로 이어지는 회화라는 이름의 숭고한 재능의 서명 과정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관례와 기량을 훌훌 털고 그는 서슴없이 긋고 긁고 지우고 내던지며 말한다. “어, 이래도 그림이 되네”. 그렇다. 그는 ‘이것이 그림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이것이 그림이다’는 말은 ‘이것이 나의 재능이다’라는 말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재능의 의미는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은 잘 그린다 못 그린다의 구분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어, 이래도 그림이 되네”하고 말할 때 우리는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구분에서 벗어나 순수한 가능성으로서의 미술을 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의 그림은 도대체 누가 그린 것일까?눈감고 아무런 물건이나 집어 들었으니 그는 혼돈의 어두움에 맡겨진 셈이다. 사실 그의 그림은 원래가 어두운 바탕 속에 감춰진 빛나는 검은 선을 되찾아 내는 일이기도 하다. 마치 별 아래 사막의 고요 속에서 무언가 빛나는 것을 찾던 어린 왕자처럼, 그러나 혼돈은 흔히 생각하듯 질서의 반대말 무질서가 아니다. 혼돈은 오히려 우리가 잃고 있는 원초성에 대한 환기 혹은 향수와 관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권오봉이 길동무라 여겼던 톰블리의 혼돈으로 깨어나는 향수처럼, 혼돈은 잃어버리고 되찾을 수 없는 질서를 일깨우는 질서, 그래서 우리는 카오스를 이야기할 때 코스모스를 함께 이야기한다. “어, 이래도 그림이 되네”이상한 것은 권오봉이나 톰블리의 그림을 보면 물론 제각기 그리움의 화살이 어느 곳을 향하는 가는 알 수 없다하더라도 일단은 어느 화가가 그림을 그렸구나하는 생각은 잠시 거두게 된다. 그리고, “어, 누가 여기서…” 그 때 우리가 만나는 것은 화가의 그림자 곧 인격으로서의 사람이다. 아이건 어른이건….‘날은 어두워지고 함께 놀던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는 무심코 나무 막대기를 집어 들고 담벼락을 이리저리 긁어 대었다. 그리고는 별빛 아래의 밤길을 한참을 걸었다.’ 2009년 9월호 아트인컬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