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종 구 | 봉산문화회관 큐레이터 하나, 선과 무의미 권오봉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캔버스 위에 거침없이 질주하듯 그은 선線들로 연결된다. 2005년 시공갤러리 전시 서문에 남긴 전희정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선은 ‘구체적 대상을 증발시킨 순수 가능태로의 환원을 말하는’ 외침이고, 그의 행위는 ‘작가를 지워버리는’, ‘이미지들 간의 유기적 연관성을 해체하는’ 격렬한 파괴행위이며, 자유에 동승하는 순수유희이다. 이러한 상황들을 기존의 가치에 대한 거부와 부정의 실천이라고 이해한다면, 왜 권오봉은 회화라는 고전적인 가치의 무의미를 회회라는 방식 안에서 대응하려는 것일까? 둘, 분비물 권오봉의 작업은 이성과 감성이라는 다른 해석 기반에서 살펴보더라도 ‘신체행위’라는 플랫폼에서 서로 해후邂逅한다고 할 수 있는데, ‘신체행위’를 떠올리면 얼마 전의 단호한 진술이 기억난다. 이강소는 ‘비디오아티스트1978’전시 인터뷰에서 머리로만 하는 논리 중심의 서구 개념미술과 구별되는 자신과 동료들의 태도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신체행위와 정신과 세계를 유기적으로 일체화시키는 상태의 작업태도를 ‘신체적인 예술’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이처럼 ‘신체행위’는 동시대 미술을 이해할 때 주목해야할 요소이며, 권오봉의 신체행위는 전방위적인 에너지가 넘쳐나듯 격렬하고, 마치 ‘행위하는 나 자신’을 향하여 일치의 그리움을 토로하듯이 열정적이다. 이번 기억공작소 전시는 특정 장소의 사태를 정교하게 옮겨 그리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사용하면서 온통 물감 범벅이 된 이젤과 테이블, 간이의자, 물감을 개는 그릇과 그것들을 씻던 개수대와 그 위의 선반, 넓은 캔버스 면에 물감을 펴 바를 때 사용하는 밀대와 막대걸레, 캔버스 표면의 물감을 긁는 갈쿠리, 그리고 바닥에는 오랜 세월동안 흐르고 뿌려지고 흩어졌던 물감 자국들이 묵혀놓은 듯 쌓여있다. 권오봉을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봐왔던 정병국은 이 전시 사태를 한마디로 ‘분비물’이라고 부르기를 제안했다. 분비물分泌物, secretion…? 분비물은 배설물과는 다르게 세포가 섭취한 외부물질을 대사하여 밖으로 방출하는 생체에 유용한 물질이다. 살아있는 식물은 토양에서 양분과 수분을 흡수하고 각종 유기물을 분비하며, 천연향료인 사향麝香, musk과 조개의 체내에서 생기는 진주眞珠, pearl가 대표적인 분비물 성형체이다. 곤충의 변태과정에서 생기는 고치cocoon도 분비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들은 대체로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생존하려는 목적으로 생성된다. 이런 면에서 권오봉의 태도를 보여주는 이번 전시물을 ‘분비물’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셋, 그 태도 권오봉은 자신이 회화繪怜, painting에 적극적으로 소속되어 있으며, 그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는 평면 위에 색을 섞고 윤곽을 구획하는 회화의 심지, 즉 회화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유사성과 심증을 좇아 끊임없이 화면을 긋고 지우고 긁은 것이 아닐까? 그가 내뱉는 ‘무의미’는 자신이 찾고 있는 그것이 자신을 빌어서 세상에 나가기에 더 이상의 의미를 보태지 말아달라는 겸손이며,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는 원초의 신체행위와 그 숨은 뜻을 눈치 채는 유희를 감추려는 심사가 아닐까싶다. 실험적인 ‘동시대 미술의 태도’들을 소개하려는 이 전시에 작가는 보이지 않는다. 변태를 향한 고치를 닮은 이번 사태에 관객이 몰입하면서, 과연 작가의 그 태도를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작업 태도는 이미 껍질이 된 기성 언어를 끊임없이 거부하려는 혼신의 신체행위를 통하여 회화의 본성, 자유와 순수유희, 진정한 인간 생의 본질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기술한다. 삶의 소환과 동시대적 해석으로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작업과 태도에 대한 기억이고, 또 다른 ‘낯선 기억’으로서 미래의 어떤 순간과 이어질 우리들 태도의 환기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