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근 오 | 미술비평

화면위에는 선(line)이, 선의 율동이, 선의 제스처가, 길게 이어지고 끊어지고, 바람처럼 날아다니고, 장독에 빠진 파리처럼 빙빙 돌고, 수학적 기호이거나 작문의 교정 부호이거나 혹은 약속된 문화적 기표에 반기를 드는 자국 같은 것들로 넘치고 있다. 또 다른 화면에는 회의에 참석한 누군가가 종이의 여백 위에 그저 뜻 없이 지겨움과 권태를 동반하면서 그어 내려간 무표정한 선들이거나 예술가가 본격적인 작업에 앞서 테크닉과 재료의 상태를 점검하려는 듯한 예비적 선들이 산만하게 횡행하고 있다. 그럼으로 해서 이 선들이 미적 구성요건에 필요한 집중력과 진지함 그리고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결국 이와 같은 선들은 시각적, 미적 소산이라기보다는 손의 자율적 본능에 속하고, 어떤 모델도 가지지 않으며 그 무엇도 재현(실제로 많은 작가들의 선은 생성하고 진화하고 소멸하는 선의 구조와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작가와 감상자 모두에게 시각적, 미적 쾌에 선행하여 우선 손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으로서, 그것이 지닌 자유로움은 보다 극단적인 작가의 시도들마저 서체회화적-선의 재현이라고도 할 수 있는 풍경이 되는 것을 저해하고 있다.
따라서 화면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독해하려는 타성을 지닌 감상자에게 권오봉의 화면에서 감성적, 시각적 미덕의 본질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줄곧 화면에서 어떤 사건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라는 의문과 기대에 부응하는 화면에 익숙한 감상자에게 그것은 선의 직감적 유희의 행위는 있으나 결과를 유보하는 불임의 상태를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행위의 분출인 액션페인팅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정서적 반사작용이 나타나기란 절제된 마티에르 때문에 그리 쉬운 일도 아니며, 익히 알려진 동양의 내면적 관조에서 행해진 서체적 필세의 육화라는 해석에도 그 형세와 운용이 다르기에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선이 형사(形似)를 잃을지언정 신운(神韻)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는 동양적 회화론에 어느 정도 빚지려고 하는 의사서체(pseudo-calligraphie)의 한 유형에 속할 수는 없다. 이러한 측면을 입증해 주는 것은 질질 끌려가거나 지향점 없이 왕복하면서 독자적인 시원과 결과를 훼손하고 있는 선의 중첩이 그렇고, 화면 구성을 위해 선묘의 간결한 형태와 적절한 배치가 강하게 암시되는 몇몇 작품에서 조차 조형적 명분보다는 손의 자발성이거나 비작위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서체의 그것과는 또 다른 세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의미와 무기력의 표현이다. 여기서 무의미와 무기력은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종이 한 구석에서 발견하게 되는 무심한 손동작의 그리기/글쓰기이다. 이 그리기/글쓰기는 불규칙하고 세련미와는 관계가 없지만 억지의 서투름도 없는 무결의 상태이다. 따라서 형(form)/지시(reference)에는 결여됨이 있을지 모르나 그 무의미의 의미에는 결여됨이 없다. 바꿔 말해서 권오봉은 어떤 미적 특질이나 감성의 분출보다는 인위(人爲)에 선행하는 무위(無爲)의 세계를 신뢰하고 있음이다. 이것은 권오봉의 회화가 갖고 있는 독특한 관점이다.
밑칠되지 않은 화포 위에 분칠하듯 쓱쓱 칠해진 회백색, 그리고 그 위에 비작위적이고 자동기술적인 선의 막연한 긁적거림, 즉 관심과 심려가 침묵하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선들의 동요, 이것이 권오봉이 행하는 것이다. 특히 시계에서 이탈된 태엽같은 선을 지적하면서 벌에 쏘여 머리가 뱅뱅돌 때 휘돌린 선이라는 작가의 천진난만한 진술은 회화적인 선과 일상의 선 사이에는 아무런 인위적인 분리가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의 일단을 보여 주는 것이다. 화면은 그래서 더욱 생동한다. 머리 속에서든, 화면 위에서든 다듬어졌거나 꾸며진 것이 아닐 때 더욱 생생한(live) 것이 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생생함이란 거칠고, 낯설고, 불확실한 것을 함축하고 있기에 권오봉의 회화가 일상의 벽면에서 출발했다는 작가 자신의 진술이 없을지라도, 그 의도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않다. 비록 많은 요소들이 권오봉의 그리기/글쓰기를 낙서화와 확연히 구별시키지만 종종 예외적으로 선긋기와 구체적 글쓰기를 병행하는 화면이 낙서화(혹은 문인화의 형식)를 상기시키고 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벽면에 그려진 비체계적이고 오염되고 꺼림칙한 자국에서 미의 체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의외로 사물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약간은 더러워지고 조금은 방치되고 흐트러진 상태라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분석을 권오봉의 화면이 증명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화면은 회화에서 수용되지 못하고 주변화 되어 있는, 운치와 격조가 미미하다고 따돌림당한 선의 잔여물들이 생명을 가지는 곳이다.
이러한 선과 글쓰기는 계산된 행위에 의하지 않고 다양한 순간들이 순발력 있게 즉흥적으로 기록되고 있다는 점에서 다이나믹한 선의 변주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행위 이후에는 의외의 과도한 시간과 노동과 테크닉이 수반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선을 긋고 검은 안료를 덧칠하고 그것을 다시 긁어내는 과정을 통하여 종이에 찍기 전의 판화의 원판처럼 선의 미세한 요철이 안료로 메워 짐으로써 선의 가벼움에 중층의 밀도를 첨가 시키고 있다. 질감의 견고함과 완성도를 가진 화면, 즉 미적 변조 없이 생으로 들이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은 권오봉이 여전히 전문가나 엘리트적 생산자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에게 하나의 딜레마이다. 왜냐하면 이 제작의 프로세스가 그의 선이 갖는 미적 의미 외적인 가벼움의 미학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면에는 생산자와 감상자 사이에 공유하는 여백이 존재할 뿐 어떤 긴장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 여백의 유혹이 작가의 독자적 공간이라기보다는 감상자의 몫으로도 여겨지는 것은 애초부터 무엇을, 어떻게, 잘 그려보겠다는 의지가 없이 무참히 내던져지고 휘둘린 것 같은 선을 통하여 감상자에게 공모의 충동-한번쯤 자신도 긋고, 던져보고 싶은-을 불러 일으키고 회화의 본질과 그 이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는 의의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생산의 주체로서의 작가와 감상자는 동일한 벽면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의 실체가 바로 권오봉의 공간이다.